동물이든 종족이든 개체든 그것들이 자신의 본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선호할 때 나는 그것들이 타락했다고 본다.
기독교 신학에서 타락은 창세기의 그 사건,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따먹고 낙원으로부터 쫓겨났던 그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불순종함으로 인해 스스로 그 관계를 깨트렸고, 때문에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육체적·정신적 완전성을 잃어버렸다, 즉 고통을 겪고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락은 다만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약속 어김’을 넘어서서 인간의 전 인격을 격하시킨 사건인 셈이다. 보통은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아파지거나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에서의 타락은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는 도덕적, 실천적 사건일 뿐 아니라 인간이 지금 처한 처지(존재)를 설명하는 존재론적 해석이기도 하다.
인류학에서는 먼 옛날, 인간이 죽은 동족의 시체를 버리고 가지 않고 땅에 묻기 시작할 때 비로소 종교가 생겨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종교를 만들어낸 건 그 죽음이라는 것, 나랑 같이 뛰어 놀고 먹고 자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차게 굳어버린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남겨진 두려움, 놀람, 불안 등이었을 것이다. 이를 해소하고자 거기에 어떤 설명을 덧붙이려 했던 마음이 장신구를, 매장의식을, 원시의 축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아주 오랫동안 반복하다가 사람들은 죽은 시체로부터 떠나버린 무엇, 즉 ‘영혼’을 발견하게 되고, 본 적은 없으나 아마 그 영혼들이 몸으로부터 떠나서 모여있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종교와 (참된) 신앙을 구분해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혹 불편할 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기독교 교리에서 선악과 사건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죽음의 해석.
이 관점에서 타락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다만 도덕적인 ‘품격’의 상실이 아니게 된다. 그보다는 본래적 상태를 잃어버림,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인간이 죽게 됨, 창조되면서 갖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소실하게 된 것일 것이다. 니체 역시 ‘타락’이라는 말을 비슷한 뜻으로 쓰고 있다. 제 6절 앞에서 니체는 자신이 타락이라는 말을 도덕Moral과는 무관하게 쓰고 있다고 밝히고, 위의 정의를 제시한다. 니체에 따르면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이로운 것, 힘을 더해주는 것을 바라게 되어 있다. 그러나 때로 그 반대의 것, 즉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이를 니체는 타락이라고 일컫는다. 즉 니체는 타락을 ‘본능의’ 타락이라는 뜻에서 쓰는 셈이다. 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나는 삶 자체가 성장과 존속을 향한 본능, 그리고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본다. 즉 힘에 대한 의지가 결여된 곳에는 쇠퇴만이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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