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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안티크리스트』읽기 - 제 40절 '예수' └『안티크리스트』읽기


 예수는 누구였는가? 이에 베드로는 일찍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복음16:16)”라고 대답했다. 그 고백을 받고 예수는 그 위에(그 고백 위에, 혹은 그 고백을 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며, 천국 열쇠를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며, 예수를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셈이다. 따라서 스스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이 예수를 무엇으로 이해하는지, 무엇이라고 일컫는지 되물어보아야 한다.

 

 비슷한 걸 해 보려고 한다. 정말 예수는 누구였는가? 이는 이미 예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물음이다. 예수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기적을 행할 때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냐면서 수군댔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열심당원, 총독에 이르기까지 복음서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의 누구임을 묻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지막에 죽게 된 것마저도 그의 누구임때문, 그가 유대인의 왕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베드로 위에 마침내 교회가 세워졌다. 그가 죽은 다음에도 예수가 누구냐는 논쟁은 사라지지 않아, 그가 신이었는지 혹은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를 두고 싸우다 교회가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기까지 했다.

 

 그럼 정말로 예수는 누구였는가? 너무 쉬운 대답은 경계하도록 하자. 수천 년이나 사람들을 논쟁하게 해온 주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되어서는 안 되기때문이다. 어쨌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생전 행적과 언행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복음서를 보아야 하는데, 복음서를 통해 예수를 이해하려고하면, 다시 예수라는인물이 가진 다층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평화와 용서를 가르치며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있는 순간에도 그들을 위해 간구한 이였으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진 비난과 경멸을 아끼지 않았다. 율법을 지키는 데 목을 매는 바리새인들을 가차없이 깎아 내리면서도 반대로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5:17)”고도 말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창녀를 가혹한 처벌로부터 구해주며 천한 이방인 여자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나누면서도, 그 자신은 이스라엘의 이름 높은 랍비였다. 사람들은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그를 한 편으로는 추종했고, 한 편으로는 회유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적대했고, 한때는 다윗의 자손이라며 찬송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결국 그를 죽여버림으로써 그가 누구였는지의 문제는 숙제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 숙제, 이 거대한 미스터리는 그가 숨을 거둔 순간부터는 예수 자신의 손을 떠나서 사람들에게로 던져졌다. 예수는 의연하고도 장엄하게 죽음으로써 아무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예수의 처형을 목격한 로마의 백부장은 그거 대함 앞에서 공포에 떨었다. 이 미스터리에 써낸 최초의 답안,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마태복음27:54)”라는 백부장의 고백 이후, 인류에게는 이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써내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이 생겨났다. 기독교의 시작.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의 운명은 죽음과 함께 결정되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렸다. …… 바로 그 죽음, 뜻밖의 그 부끄러운 죽음, 대개 천민들에게만 사용되었던 바로 그 십자가-바로 그 끔찍한 역설이 제자들을 저 사람은 누구였을까? 저것은 무엇이었을까?’하는 진정한 수수께끼에 직면하게 했다. –뒤흔들리고 마음속저 깊은 곳까지 모욕을 당한 느낌, 그리고 그들의 대의명분이 그러한 죽음에 의해 반박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 ‘왜 하필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가?’라는 그 끔찍한 의문 부호.

 

여기에서 니체는 제자들을 문제삼는다. 제자들이야말로 예수의 죽음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그렇게 죽음으로써 자기의 정당성이 부정당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를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심리는 무엇이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기독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다시 인용.

 

이 경우 모든 것은 필연적이고 의미 있고 합리적이어야 했다. 제자의 사랑은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나니까 비로소 틈이 생겼다. ‘누가 그를 죽였는가? 누가 그의 철천지 원수였나?’-하는 물음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대답은, 당시 지배하고 있던 유대교, 그것의 최상위 계급이다. 이렇게 예수를 죽인 자를 유대교와 그것의 최상위 계급이라고 생각하게 된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항하여 봉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후 그들은 예수도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자로서 이해하였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그리 쉽게 답해질수 없는 이유는, 앞서 말했던 그 모습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는 율법 교사이면서 때로는 의사였고 때로는 혁명가였으며 때로는 군중을 이끄는 세력가였다가 또 때로는 침묵하는 양심수였다. 따라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아주 조심스럽고 정교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그 질문에 맞게 대답하려면 예수의 다양한,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을 모두 종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쉽게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니체는 제자들이 너무 성급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어떤 이유와 의미를 찾고 싶은 마음과 그 수수께끼가 뿜어내는 불안에 너무 빨리 질려버린 나머지 예수의 삶과 가르침으로부터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 그 중에서도 누가 그를 죽였는가만을 고민했으며그 결과 예수를 단지 혁명가로만 한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과 약속이 세상의 심판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사회 질서와 기득권층에 대한 복수로 오해되었다는 게 니체의 (앞으로의) 주장이다. 니체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이 그 반대에, 용서와 저항하지 않음과 복수심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으며 십자가는 예수 자신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제자들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고 니체의 (보다 불교적인) 해석이 맞을 수도 있다. 니체가 역설하는 바는 그래서 제자들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제자들이 어떻게 그 해석에 도달했는지. 지배계층에 대한 (천민적) 복수심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혁명가와 심판자로 해석하게 만들었다고 한다그러니까 그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본 원인은 제자들의 복수심에 있다는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말 중에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것만을 본다는 게 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제 눈에 안경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게 더 참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객관적인 성경 해석은 우리로부터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있다. 왜냐면 우리도 우리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것은 나에게만은 틀림없이 확실하다. 이걸 주관적 확실성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남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남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걸 무시하면 그 때부터 개독이 된다.


덧글

  • 식용달팽이 2014/07/24 21:38 # 삭제 답글

    문제는 당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신의 아들이 대신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종교가 기독교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

    기독교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생전에는 예수를 본 적도 없는 바울이었으니, 바울에게 물어 봐야 정확한 답이ㅡ나오지 않나 싶어요. 바울 서신을 보면 초대 기독교회ㅜ내에서도 바울파, 베드로파 등으로 교리가 나뉘었던 게 목격되니까...

    이미 사도들 간에도 의견이 많이 달랐던 거죠.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건 똑같더라도, 어떻게 설명했는지, 혹은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확연히 달랐다고 봅니디.
  • 서초3동천재소년 2014/07/25 23:30 #

    그런 종교가 있었는지 몰랐어요 ㅎㅎ 혹시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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