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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초3동천재소년


니체,『안티크리스트』읽기 - 제 52절 '응답' └『안티크리스트』읽기

 

 처음에 교회에 다녔을 때 선배들이 너는 아직 하나님을 못 만난 것뿐이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고나면 마음이 달라질 거고, 그러면 비로소 성경을 깨닫게될거고,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회심하게될 거라고 그랬었다. 그 때 나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하나님을 만난다라는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그랬지만 신기하게도 그때 교회 형 누나들은 그 말을 아무 문제 없이, 자유롭게 사용하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때 그 형 누나들한테는 하나님을 만난다라는 말이 분명 무언가를 의미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분들은 하나님을 만난다라는 말로 어떤 내적 체험을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약속잡고 어디어디에서 만나는 그런 만남이 아니었다. ‘만난다는 말이 의미하듯 거기에는 그 분의 존재(혹은 임재)에 대한 느낌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말씀이 지금 이순간 나에게 하시는(혹은 주어진)’ 말씀으로 느껴지는 경험, 말 그대로 그 분의 존재와 대면하게 되는순간을 말한다. 심리학에서는 God-experience라고도하는데, 진짜 그런 게 있다. 엄마가 식탁 위에 놓고 간 쪽지를 읽으면서 엄마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씀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 그게 그냥 기록물이 아니라 마치 지금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좋은 책을 읽고 교훈을 얻는 거랑은 느낌이 약간 다르다. 어쨌든 말씀 읽기나 기도는 본질적으로는 그 분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게 그냥 우연찮게 아다리가 맞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같은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의심보다는 확신이 점점 커지게 된다. 그 확신에 공감할 수도,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아마 비슷한 체험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게 없으면 웬 미친놈인가 싶거나 이해가 안 될 텐데, 그러니까 공감하기 어려울 텐데, 만약 있으면 자기가 가진 그 경험으로부터 그게 뭔지 유추해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미친 듯 기도하는 걸 보고 질색하는 사람들이 또 많은데, 기독교인들끼리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안 하는 게 일종의 암묵적인 룰처럼 되어 있다. 왜냐면 그게 뭔지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건 지금 위와 같은,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화하는 중인 것이다.

 

이 God-experience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경험에서 꽤 중요하다. 어쩌면 그게 전부일수도 있다. 신앙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분 앞에서이루어지며, 그 분과 나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앙을 가진다 함은 내가’ ‘그 분을믿고 따르는 것이다.기도는 내가 그 분에게 간구하는 행위이며, 말씀 읽기는 그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말씀 읽기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은 언제나 기록된말씀이다. 그러니까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게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일 수 있기 위해선 늘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는 늘 다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말씀을 읽기 때문이다. 이 해석 행위는 항상 나의 상황 속에서 말씀을 읽는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말씀을 읽는다 함은, 조금 더 적나라하게 그 분으로부터 말씀을 듣는다함은, 나의 상황에 입각해서 말씀을 새로 해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늘 새로운, 말하자면 살아있는해석이 나오며, 그래야만 말씀읽기가 그 분과 나의 대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 중 하나가 동일시. 그러니까 본문에 나온 인물 중 하나에 자기 상황을 대입해서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기선교와 취직 중에서 고민하는 4학년생이 큐티책에서 아브라함의 출가 부분,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세기12:1)”)을 읽게 된다면, 그는 이 본문을 통해 단기선교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살던 곳에서 떠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 쉽게 자기를 대입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좀 지나긴 했지만 문창극이 일제강점기를 우리민족이 받아야 할시련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에 우리나라의 경우를 그대로 대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성경으로부터 개인적 삶의 지침을 읽어내길 원하는 사람들이 쉽게 쓰는 방법이다. 앞서 말했듯 이런 방법으로라면 사실상 무한히 많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많은 해석이 모두 옳은해석일수 있는가? 니체는 여기에 물음표를 붙인다.

 

한 신학자가 베를린에서든 로마에서든 성서에 나오는 한 마디나 하나의 체험, 혹은 예를 들어 자기 나라 군대의 승리 같은 것을 다윗의 시편과 같은 보다 높은 조명 아래에서 해석하는 방식은 항상 너무나 대담해서 문헌학자는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슈바벤 출신의 경건주의자나 그밖의 암소같은 족속들이 자신의 삶의 곤궁한 일상과 답답함을 신의 손가락을 가지고 은총신의 섭리구원의 체험이라는 기적으로 만들어 놓을 때 문헌학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욕을 한다.

 

그러나 예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동원한다면, 신의 솜씨라는 것을 그렇게 남용하는 것이전적으로 유치하고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이 해석자들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여기에서 문헌학자라는 말을 쓰는데, 52장 앞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는 텍스트의 엄밀한 뜻을 밝히는 사람정도가 될 것 같다. 그러니까 텍스트가 원래 어떤 뜻이었는지, 있는 그대로의 뜻을 엄밀하게 밝혀내려는 입장에서 보면 앞서 이야기했던 성경의 개인적인해석은 이상해 보일 것이다. 성경의 저자는 나를 몰랐으므로 지금 나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했을 리 없다.따라서 성경을 지금 나에 대한 메시지로 읽는 것은 문헌학적으로는틀린 해석 방식이다.

 

 하지만 그게 기독교가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확실히 기독교는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따라서 그걸 발견해내는 것이 신앙적 체험일 수 있다. 니체는 싫어했지만 어쨌든 당시의 독일 기독교인들도 그랬고, 지금 우리도 그렇다. 물론 터무니없는 경우도 많다. 내가 삽을 퍼서 저지른 일은 일단 내 삽질이다. 물론 하나님이 개입하셨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거기에 시련이라는이름을 붙이려면 보다 복잡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때로 사람들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은혜만으로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궁극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전제한다면 사건에서 은혜의 개입을 완전히 빼버리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 같다. 유물론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은혜는 물질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그게 유치하다고 비난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게 기독교인 것을. 여기선 타협이 불가능한 것 같다.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믿고 욕할 수도 있다. 이건 애초에 설득의 범주를 넘어서있다. 설득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쓰느냐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비슷한 체험을 했느냐의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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