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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초3동천재소년


교회는 왜 사역자에게 지배당하는가? └Christianity NOW


 교회의 문은 열려 있다. 그래서 누구나 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교회에 온 사람들은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므로 (원칙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지녀야 한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붙였을 때 그 정신은,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대신하거나 대표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교회 안에서 계급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모든 사람이 신과 개별적으로,사적으로 관계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와 신의 사이에 다른 누구의 자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신과 대면하는 길에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면,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서신에게로 나아가고 신의 수신호가 그를 통해서우리에게로 전해진다면, 그는 그 위치 덕분에 너무나 쉽게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파문을 무기로 온 유럽을 지배했듯 말이다. 신의 말씀이 어떤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로 올 때, 우리는 말씀이 비롯한 신 자신과 말씀이 전해져 오는 통로를 함께 숭배한다(때로는 통로를 신 자신보다 더 우러르기도 한다).



 한때 독일에서는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 계급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성직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독점했고, 그 독점적 지위를 무기로 민중을 지배했다. 민중들은 성직자들이 성경을 아무리 곡해해서 이용해도 거기에 대처할 수 없었다.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때맞춰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쇄술을 개발해 번역본 성경을 싼 값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독일에서는 민중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성경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성직자 권력에 비로소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의 반박문이 단순한 벽보에서 끝나지 않고 종교 개혁으로 이어졌던 것은 민중들이 거기에 호응했기 때문이며, 민중들이 호응했던 건 스스로 성경을 읽고 그 주장의 옳음을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성직자 계급이 성경의 가르침을 독점한 상태였다면 민중들은 루터의 주장을 아마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루터의 개혁은 성공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계급과 권력관계는 여전히 남아있다. 중세 교회가 성직자와 민중으로 나뉘었다면 지금(21세기의 한국 교회)은 전문 사역자와 평신도로 나뉜다. 전문 사역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기준은 단순하다. 전문 사역자는 교회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는 교회에서 노동하며, 그 대가로 생계를 유지한다(대개 대학에서 신학 과정을 수료한다). 평신도는 교회 밖에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과거의 성직자 계급은 성경을 독점했다. 지금의 사역자 계급은 신학을 독점한다. 현대의 신학은 다양하면서 전문적이고, 동시에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신학은 이미 성경의 모든 부분에 주석을 붙였다. 따라서 현대에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내용뿐 아니라 그에 붙은 해석까지도 소화해야 한다. 사역자 계급은 먼저 대학에서 신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교회에서 생계를 보장받음으로써 평신도들이 노동하는 데 쓰는 시간을 확보하고, 이 시간을 다시 신학 연구에 투자한다. 반대로 평신도들은 생업이 따로 있으므로 그만한 시간을 낼 수 없다.


이렇듯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차이는 신학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를 낳으며, 이는 교회 안에서의 권력 관계를 만들어낸다. 평신도의 성경 이해는, 앞서 말했듯, 그 계급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신학적 깊이를 갖추기 어렵다. 그러나 오로지 성경에서만 비롯한 이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빈약한 것이며, 사역자의 신학을 무기로 한 비판에 취약하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삶을 맞추려는 (선량한) 신도와 교회는 늘 그걸 해석해주는 사역자의 영향 아래에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진데, 하나는 진지해지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신도가 사역자 수준의 지식을 스스로 쌓는 것이다. 지식의 대중화로 말미암아 신학에 접근하는 길은 누구나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그 길을 실제로 따라가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생계를 자기가 책임지는 평신도 계급에게는 그게 불가능하지만 사역자 계급은 신학 연구와 생계를 동시에 해결하기에 가능하며, 이를 토대로 신학을 독점한다. 사역자 계급의 신학 독점은 곧 성경에 대한 이해의 독점이며,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이는 동시에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권력의 독점이다.


사례도 무수히 많다. 한국 교회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인, 사역자의 전제적 권력과 이로 말미암은 폐단은 사역자가 교회에서 가장 성경을 잘 아는사람 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역자의 교회 내 노동에 대가(소위 사례비’)를 지급함으로써 그의 일상적인 노동이 면제되고, 이 시간이 신학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으로 바뀌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주일 예배에서 이러한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동시에 더욱 강화된다. 사역자의 설교는 그가 주중에 확보한 여유 시간의 결과물이며 그의 머릿속 이데올로기를 평신도들에게 전파하는 작업이다. 이를 내면화하며 평신도 개인은 사역자와 이념적 주종관계를 맺는다.


 그러니까,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


덧글

  • 식용달팽이 2014/12/21 02:19 # 답글

    이 글 뒤에 쓴 글은 몇몇 개념에는 동의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 글은 한숨만 나오네요.

    개신교회의 구조는 평신도와, 평신도에 의해 추대된 장로, 그리고 평신도와 장로들의 동의에 의해 성경강해자로 목사가 '초빙'됩니다. 부교역자들도 '초빙'인거죠. 그래서 사례비라는 표현을 씁니다. 손님인 거에요. 그들은 교회의 주역도 아니거니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와서 성경을 가르쳐 주는 신학자에게 성도들이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하는 거죠.

    그런데 목사라는 직위가 가진 특수성이 이 구분을 매우 모호하게 만듭니다. 성경의 권위로 장로나 성도들을 훈계할 수 있다는 거죠. 교회의 일을 결정하는데, 장로 및 성도들이 잘못 결정하지 못하게 성경적, 신학적인 근거로 그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모호해지고 목사가 교회의 주인인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교회가 오히려 왜곡됩니다. 이 블로그의 주인도 목사를 주인인 것으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오해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조엘 오스틴 같이 번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목사를 잘못 만나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그 성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도 안되는 말에 솔깃해서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들이 조엘 오스틴을 성공하게 만들어 준거죠. 그들이 죄인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요? 사랑의 교회요? 그것을 지지하는 성도들이 있기에 가능한 겁니다. 올바른 성도들이 있으면 비정상적인 목사는 활개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에서 오는 권력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드는 데는 전혀 관심 없는 성도의 문제입니다.
  • 서초3동천재소년 2014/12/21 14:04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제시해주신 상황의 당위성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 교회가 목회자 개인의 카리스마와 신학적 색채에 따라 아주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몸글에서 '지배'라는 언사를 사용할 만큼)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말씀해주신대로 성도들의 게으름이나 주인의식 없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상황을 바꾸어놓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이 점에서 저는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태도-'중요한 것은 현실을 개혁하는 것이다'-를 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범죄율이 높은 사회에서 그 원인을 개인의 부도덕함이나 시민의식 없음으로 돌려놓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비난할 대상이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이러한 분석으로부터는 비난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마뜩치 않죠. 그럴 때 '의식적 각성'같은 나이브한 대안 말고는 마땅히 가능한 게 있나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문제에서도 성도들을 나태하다고 비난하는 건 명쾌한 해석은 될 수 있어도 개혁을 위한 실제적인 동력을 제공해줄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씀해주신 문제의식에도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글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 생각해놓고 있는데, 두 번째나 세 번째에서 말씀해주신 문제의식을 다룰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짚어주신 것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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