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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초3동천재소년


아마추어 신학이 어떻게 교회를 망치는가 └Christianity NOW



 종교개혁의 정신은 단순하다. 신자의 모든 신앙행위는 그 기준을 오직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오직 성경이라고 말함으로써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전통, 관습, 교회 시스템과 성직자의 자의적 지배 등등을 배제했다. 그 결과 우리-프로테스탄트는 위의 조건들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동시에 성경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은 다만 교회 예배당에서의 행동규범이나 일요일에 만나는 동료 신자들과의 관계지침 정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로 일요일에 선포되나 일요일이 아닌 날에도 실현된다. 도리어 교회공동체 바깥에 머무르는 시간, 곧 일요일이 아닌 날에 더욱 그 주장하는 바가 선명해진다 할 것이다. 삶의 영역으로 말하자면,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영역의 규범일 뿐 아니라 신자 개인의 생활영역과 직장에서의 규범이며, 나아가 신자의 공적인 삶(시민적 삶)에서의 규범이기도 하다. 즉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려면 교회에서뿐 아니라 집에서, 학교나 회사에서, 트위터에서, 네이트 판에서, 일베나 오유에서, 나아가 토론장과 투표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보편적인 규범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가르침에 자기의 삶을 맞추어야 한다. 자기 삶을 성경에 비추었을 때 잘못된 점을 고치고 어긋난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 반대가 되면 안 된다. 다시말해 성경에서 배운 대로 삶을 교정해야 하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맞추어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해서는안 된다. 성경의 왜곡된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자기 삶의 방식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 성경을 자기의 사적인 동기와 행동에 대한 변호 정도로 삼는 것 말이다.



 

 들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먼저는 자기의 삶을 교정하는 것, 자기부정이 부단한 고통과 노력(혹은 은혜’)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성경을 접하기가 좀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우선 번역본이다. 따라서 원본 성경 위에 번역으로 인한 장애물이 한 겹 있고, 이 위에 이제까지 축적되어온 신학의 연구결과들이 쌓여 있다. 여기에 다니는 교회로부터, 주변의 동료 신자들로부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받는 영향들이 있고, 내 자신이 사적인 동기(이해관계, 성격, 취향, 경험 등등)로 성경의 가르침을 비뚤게 이해할 위험도 늘 있다. 이처럼 수많은 갈래길들을 뚫고 성경의 원래가르침에 도달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늘상 지적하는(그러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이러한 갈래길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 도착한 다음 거기에서 찾은 돌멩이들을 진리라고 믿는 오류(혹은 자기기만)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 곧 아전인수격의 해석은 그 동기가 매우 다양하며 따라서 너나할것 없이 보편적인 문제다. 작게는 신자 개인의 신앙에서부터 교회 전체의 신학, 나아가 교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그 층차가 매우 다양하다. 나누어보자면 신학의 문제(이론적), 신앙의 문제(실존적), 교회의 문제(사회적)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신학의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며 또한 쉽게 은폐된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이 해석되는 통로이다. 따라서 이는 개인의 신앙이 뿌리박아야 하는 근본이자 현실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이다(현실의 교회는 주로신학의 색채에 따라 구분되므로). 신앙의 문제를 앓는 교회는 해체되거나 무능력해지지만, 신학의 문제를 앓는 교회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되어 여러 곳에 해악을 끼친다좋은 신학만으로 좋은 교회가 만들어지지는 않으나, 좋은 신학이 없이 좋은 교회가 생겨날리도 없다. 따라서 좋은 신학은 좋은 교회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조건들에 비해 보다 근본적이고 중추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른 신학의 없음은 이미 여러 차례 한국교회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바 있다. 여기에서는 바르지 못한 신학의 한가지 경우, ‘아마추어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원래 아마추어란 프로페셔널의 반대개념으로서 어떤 일에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원래의 아마추어개념은 직업적인 기준에서 비롯되었지만 여기에서는 해당 분야를 대하는 태도와 전문성의 문제에서 이를 사용하고자 한다. 즉 어떤 신학에 아마추어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이는 해당 신학의 학문적(신학도 학문의 하나이므로) 태도와 수준이 응당한 정도에 이르지 못했음을 뜻한다. 아마추어 목사같은 표현은 원래대로라면 형용모순이지만(목사는 목사가 직업이므로), 여기에서는 그의 신학적 태도와 수준을 문제삼는 표현으로써 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다시피 신학 역시 진리를 다루는 활동이다. 특별하게 신학의 경우에는 성경과 인간 세계를 통해 계시된 절대자(하나님)의 가르침을 연구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의 목적은 무엇보다 기독교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있다. 따라서 신학을 하는 것, 신학함에 올바른 태도는 진리에 대한 존중과 추구이며, 이를(진리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는 아마추어다. 이는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며, 신학의 결과물을 소비하는 것뿐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의 완결된 전체(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신학 역시 그러하다(그러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한다. 성경의 특정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부각시키거나,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 역시 아마추어다. 강조 행위에는 늘 의도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내용을 취사 선별한다면, 이는 성경의 전체성을 무시한 것이거나 성경을 또다른(사적인) 의도로이용하는 것이다.

 

 21세기에 와서야 비판받기 시작한 번영신학은 이와 같은 아마추어리즘의 단적인 예이다. 그 신학은 부에 대한 욕망과 부를 향한 추구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번영신학의 특징들, 축복구절에 대한 선택적 강조와 화려한(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대한 집착 등이 나타난다. 반대로 해방신학을 비롯한 기타 사회참여적 신학 역시 이러한 아마추어리즘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빈자와 약자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빈자와 약자에 대한 동정이 그 자체로 신자를 감동시키고 추동한다면, 그리고 차후에 성경의 가르침이 이를 정당화하고 타인을 동참시키는 데 이용된다면 이 역시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할 수 없다. 앞의 번영신학과 색채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지만(반대이지만), 패턴은 동일하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적 신앙의 차원에서도 역시나타난다. 이는 한국교회는 양적인 성장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신학 스펙트럼을 갖추게 되었으나, 동시에 신학의 쇼핑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자 개인이 선이해나 사적 취향 등에 따라 교회를 고를 수 있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좋은교회란 대개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가리킨다). 자기부정과 있는 그대로의성경의 가르침에 도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셈이다.





 모든 신앙은 자기의 선이해에 성경의 가르침을 한정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내가 아직 모르는 진리는 가슴떨리지만 늘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예수의 익숙함이 내가 모르는 예수의 가슴떨림을 정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고착되고 만다. 흐르는 물이라고 썩지 않는 것은 아니나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 법이다.


덧글

  • 식용달팽이 2014/12/31 01:31 #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제 취향의 글'이기 때문에 더 공감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부 교회의 KJV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일부 성도들과 사역자들의 '번역본'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극에 달해 있는가를 확연히 보여 주는 예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한국인 히브리어, 희랍어 연구가에 의해 원문을 직접 번역한 성경도 판매량은 많지 않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판국이죠. 2년쯤 되었을까요.

    번영신학이 21세기에 와서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한국 교회의 측면에서겠죠. 미국에서는 번영신학에 대한 반박도 바로바로 나와 줬는데, 한국에서는 번영신학만 받아들였지, 그에 대한 반박을 늦게 받아들인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을 초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 한국은 신학 수입국이죠. 한국 자생신학은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단 판정을 받는 곳들이니...

    한창 어린 시절을 번영신학이 만연한 분위기에서 보내다 보니, 번영신학의 위축으로 교계가 침체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썩 좋은 모습은 아닌데, 그게 그나마 바른 방향으로 가는 수순이라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됩니다.

    번영신학에 대한 극복이 차츰 이루어지고 있는만큼, 해방신학에 대한 극복도 이루어져야 할텐데;;; 이 부분은 한국에서 조금 약한 모습이네요. 물론 해방신학 자체가 소수를 형성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것도 복음의 본질과는 좀 거리가 있는 신학이라;;
  • shaind 2014/12/31 16:10 #

    한국인 히브리어, 희랍어 연구가들이 '원문'(인정받는 사본들로 만들어진 본문)을 번역한 성경은 이미 1977년에 나왔습니다. 점차 외면당했지만요.
  • 식용달팽이 2015/01/01 10:10 #

    shaind// 그런가요. 지금까지 나와 있던 희브리어, 희랍어 역본들은 영어 등으로 나온 걸 다시 번역한 거라 들었는데, 제 지식이 좀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군요.
  • 서초3동천재소년 2015/01/02 16:38 #

    그렇군요... 두 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응용' 신학과 말하자면 '순수' 신학을 혼동해 쓰는 것이 한국교회의 병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아이브로 2015/01/01 17:35 # 삭제 답글

    "또한 성경은 하나의 완결된 전체(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신학 역시 그러하다(그러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한다. 성경의 특정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부각시키거나,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 역시 아마추어다."

    이 주장 또한 "아마추어적인 생각"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주장을 제기해봅니다. 성경이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주장이나, 성경의 모든 부분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축자영감설의 전제에서 따라나오는 결론 아니던가요. 아마 말씀하신 의도는 특정한 부분의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자 함인 것 같으나, 현대의 성서비평학과 교의학적 성서론과 상충되고 있는 것 같아 의견을 제시해 봅니다.
  • 서초3동천재소년 2015/01/02 16:34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 점에서 전제끼리 상충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의 구상에서는 헤겔식의 학문wissenschaft 개념, 그러니까 학문을 곧 '체계'를 갖춘 지식으로 정의하고, 신학의 아마추어리즘을 이러한 체계의 없음(혹은 무시)로부터 이끌어내려고 했었는데, 성경과 신학 개념을 뒤얽어서 쓰다보니 실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생각해서 쓰면서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데, 성서비평학과 교의학적인 성서론에서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공부해보겠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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