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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3동천재소년의 철학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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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쓰다. 쓴 진실을, 쓰다.
by 서초3동천재소년


시나리오 A └외부기고

 


 남자와 여자는 일 년 동안 연애를 했다. 봄에 서로를 만나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이 다시 돌아올 무렵에 헤어졌다. 그 사이 긴 전화통화 몇 번, 짧은 문자메시지 몇십 개, 긴 편지가 두어 개 오갔으나 이별은 끝내 물러지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남자의 뭍으로, 여자는 여자의 바다로.


 일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서로의 몸에는 서로가 새겨 놓은 습관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홀로됨은 무를 수 없는 현실이며 각자가 굴려 올려야 할 각자의 바위였으나 또한 단번에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지게였다. 둘은 일 년 동안 허다한 차이를 겪어냈고 끝내 참아낼 수 없는 차이로 인해 헤어졌으나 그것만은 똑같았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번, 편지를 적었다가 찢어버리기를 또 여러 번, 집 앞 문간에 찾아가는 상상만을 여러 번 하다가 끝내 남자는 용기를 내어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미련을 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여자도 승낙했다. 둘은 이별 여행을 떠났다.


 당일 둘은 정확한 시간에 약속장소에서 만났다. 남자가 보는 여자, 여자가 보는 남자 모두 변한 것 없는 모습이었다. 둘은 일 년간 만나며 함께 들렀던 장소를 순례했다. 여자의 집 앞 노원 문화의 거리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처음 싸웠던 날 화해하며 걸었던 청계천변을 다시 걷다가, 처음 손을 잡았던 북서울 꿈의 숲을 휘 두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둘은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장소마다 묻어 있던 지난 기억들을 복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둘 사이는 조용했으나 그건 침묵보다는 차라리 묵념에 가까웠다. 남자와 여자 모두 자기 안에 새겨있는 지난 일 년을 세어 보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 시간 동안 자기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고. 단순한 유기물의 복합체 말고, 생산과 소비를 무한히 반복하는 노동자 말고, 진짜 사람으로 말이다. 순간들 하나 하나가 모두 전구처럼 또렷했고, 선명했다.


여자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남자는 말없이 맞은편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석양이 숲을 덮어버릴 듯 내려와 있었다. 불현듯 강렬한 아쉬움이 남자를 덮쳐 왔다. 그 순간 둘을 괴롭혔던 둘 사이의 차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다만 함께 보냈던 시간이 기억으로, 어렴풋한 행복이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한 번 더 생각했으면 안 생겼을 오해들, 한 번 더 기다렸으면 안 났을 싸움들이 후회로 변해 가슴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남자는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불현듯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되새김, 침묵, 아쉬움, 깨달음, 후회, 그 모든 것이 말이다. 둘은 이미 끝의 끝까지 와 있었다. 돌이켜 돌아가는 건 생각만으로도 버거웠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금새 황혼이 덮여올 것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여자를 보내주어야 했다. 둘은 더 이상 시간을 무한정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여자가 돌아오는 걸 보며 남자는 일어섰다. 둘은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걸었다. 버스정거장에 도착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버스가 오는 쪽을 계속 쳐다보았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만이 둘을 삼킬 듯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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